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빈곤함 (문단 편집) == 식량 부족 == >최전방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에게도 식량을 제공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국가로 실로 심각한 곤란에 처해 있다. >---- >([[예비역]]) [[미합중국 육군]] [[대장(계급)|대장]] W. 리브시(Livesy)[* 전 [[주한미군]] 사령관. [[1984년]] [[6월 1일]]부터 [[1987년]] [[6월 25일]]까지 재임했다. 즉 1980년대에 북한군을 본 셈인데, 당시는 [[고난의 행군]]으로부터 10여 년 전이었고 최전성기에 비해 상당히 쇠퇴하긴 했지만 [[소련]]의 원조가 비교적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이 때조차 북한은 군인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제공해주지 못한 것이다.], 북한군의 화전 경작에 대해 언급하며 >김정은이 집권 이후 주민 환심 사기 위해 전투식량을 보관하는 2호 창고를 개방해 북한군의 식량사정이 매우 악화되었다. >---- >2017년에 귀순한 북한군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771|병사]][* 그나마 보급 사정이 좋다던 최전방 부대에서 복무하던 병사의 경험담이다. 이정도면 후방부대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다.] || [[파일:양식공급규정과 체계.jpg|width=100%]] || || 북한군의 명목상 급양규정[* [[6·25 전쟁]] 이전인 1940년대 후반이나,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던 1960년대나, 넓게 봐 줘서 1970년대 말까지는 이를 지켰던 일선 부대가 적어도 하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일반적인 사회주의 국가 정도였기 때문. 그러나 그 이후는 도서정리 사업을 시작으로 비참하게 몰락했다. 참고로 [[조선인민군]]이 모든 부대에서 저걸 철저하게 지켰던 유일한 시기가 6·25 전쟁 이전인 1940년대 중후반과 6·25 전쟁 중인 1950년대 초반(1945 ~ 1953)일 뿐이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워낙 많이 맞아버린 북한([[원산]]은 도시 전역이 황폐화)인지라 6·25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이것대로 급양을 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 [[쌀]] 800g이면 0.5되(5홉)[* 조금 더 보편적인 [[햇반]] 기준 200g짜리 4개.], [[채소]] 1.5㎏이면 1봉지에 1,000원씩 파는 [[상추]] 10봉지, 육류 100g이면 마트에서 1,000원씩 파는 [[의성 마늘햄]] 1개, [[생선]] 200g은 [[캔참치]] 가장 작은 걸로 2캔이며 [[담배]]의 경우 0.5갑(10개피)이다. 나머지는 [[숟가락]] 이하의 단위라서 생략한다. 북한은 남한과 평야 면적이 비슷하다. 그리고 평야 지역은 추워봤자 쌀로 유명한 남한의 [[강원도]] [[철원군]]과 기후가 유사하다. 곡창지대인 [[황해도]] [[재령군]] 재령평야는 철원보다 따뜻한 곳이다. 강수량이 적다고는 하나 서부 지역은 강수량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강이 여럿 있으며, [[청천강]] 일대나 황해도 [[연백군]] 연백평야 일대는 강수량도 적지 않다. [[평안도]]의 대표 소우지인 [[평양]]보다 강수량이 적은 [[백령도]]는 현재 3년간 자급자족 가능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게다가 먹여 살릴 인구 숫자도 한국보다 절반 이하로 적다. 그러나 [[광복|해방]] 이후 [[1940년대]]~[[1950년대]] 자체가 후진적인 농업 기술로 한반도 전역이 식량난에 시달리던 시기었고, 그 이후에도 효율을 높이기 어려운 농업의 집단화, [[주체농법]] 같은 삽질, 무리한 군 규모 증대[* [[북한]]은 인구의 4%가 군인으로 이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군인 밀도다. 4%라고 하면 적어 보이지만 국민 25명 중 1명꼴로 직업이 군인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2000년대 이전까지 군인 밀도가 1.33% (75명 당 1명) 정도였고 2020년대에는 1%까지 줄였는데, 이것도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니다. 참고로 가장 표준이 되는 [[미국]]의 군인 비율이 인구의 0.5%고, [[중국]]이 0.25%, [[일본]]이 자위관 기준 0.125%다. 북한보다 높은 건 아마 40~50%로 이루어졌던 [[스파르타]] 뿐일 것이다.] 등으로 군인 한 명에게 줄 식량은 적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식량]]난에 시달리지 않았던 시기가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된다. 그나마 사정이 좋았던 시기는 [[1970년대]]와 [[1980년대]]였지만, 이 때도 북한 병사들은 무조건 싹싹 긁어서 다 먹었으며 염장 무와 밥으로만 끼니를 해결했고 "고깃국이라도 배급되는 [[명절]]을 군인들이 손꼽아 기다렸다"는 증언이 있다. 동시기 남한에서는 1976년부터 1식 3찬[* 밥, 국, 김치에 반찬 2가지.] 제공으로 변경되었고, 1980년대 초반부터는 특식도 [[계란]]에서 고기 배식으로 바뀌었으며, 자율 배식까지 조금씩 허용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남한 병사들은 정량 배급을 받으면 배고프지 않게 먹을 수 있었고, 식단이 맛이 없으면 간혹 밥을 남기기까지 했다. [[https://youtu.be/0HxX3sDua-8|1980년대의 기록 영상]] 등을 보면, 반찬이 김치, 콩나물무침, 된장국 등으로 부실하긴 하지만[* 당시의 한국은 지금보다 경제력이 낮았고 밥, 국에 반찬이 2종류, 그나마 그 중 하나는 김치에다 나머지 하나는 콩나물 같은 나물반찬이 전부였던 때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지금처럼 PX에서 햄이나 김을 쉽사리 사다 먹을 수 있던 시대는 아니었다.] [[밥]]은 식판의 깊이가 두 배 정도 되는데도 고봉밥으로 넉넉하게 줬다. 점심에 푸짐하게 먹이는 군대의 특성을 감안하면, 점심에는 고기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9에서 1981년까지 최전방에서 복무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가끔 북한에서 대남방송이랍시고 확성기로 [[돼지]]를 잡을 때마다 잡는 과정을 다 들으라고 시끄럽게 틀었지만, 남한 측은 "북한 돼지들은 죽어도 편히 못 죽는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나마 사정이 좋았을 때도 이 정도였으니, 이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고난의 행군|1990년대는 말할 필요도 없고]], 2000년대 이후도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심해진 면도 있다. 동시기 한국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1식 4찬[* 밥, 국, 김치를 포함한 반찬 3가지로. 예컨데 쌀밥, 미역국, 소시지 케첩볶음, 깍두기, 김이 나온다.]으로 늘어났고, 우유 같은 음료나 아이스크림 등의 후식 및 부식도 늘었다.[* 다만 1997년에 [[IMF 사태]]가 발생하자, 일부 부대에서는 1998년 중후반까지 우유 급식 및 햄버거 공급이 중단되었다.] 북한 육군 특수부대 작전 장교 출신의 임천용은 남한에서는 남한이나 국제사회에서 지원하는 식량이 북한군에 많이 간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오해이며, 북한의 특수부대도 하루 한 끼 [[죽]]을 먹고 고기 배급은 까마득한 옛말이며, 지휘관조차 [[군수물자]]를 보급 받고 있지 못한 상황이라고 증언했다. 다른 군 출신 탈북자들은 한국 등에서 온 [[쌀]]들은 모조리 전시 예비 물자창고에 집어넣으려고 그동안 창고에 있던 묵은 쌀을 꺼내 먹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정보의 차이는 북한이 [[지역감정|지역별로 차별 대우]]를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북한은 지역감정을 국가 통제에 사용한다. [[평양]] 같이 중요한 지역일수록 특권층이 밀집되고, 반대로 중요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대우가 시궁창으로 변한다. 이렇듯 북한이 워낙 정보 통제를 철저히 하고 [[려행증|지역이동에도 허락을 받을 정도]]로 통제하다 보니, 같은 북한 주민이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사실상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지역별 주민들의 삶, 지식, 경험이 완전히 다르다.] 다만 이는 한국이 장기보관을 막고자 1년 이상 보관이 불가능하도록 쌀을 전부 도정했기에,[* 쌀은 도정하고 시간이 지나면 산화되어 맛이 없어지고 종국에는 못 먹을 물건이 된다. 초창기 [[햇반]]의 여름 생산분 품질이 떨어졌던 것도 같은 이유.] 사실이 아니거나 북한 측에서 정말로 장기보관했다가 전부 상실했거나 상한 쌀을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먹고 살 만했던 [[고난의 행군]] 이전에도 마른 [[옥수수]] 몇 알에 [[감자]] 하나로 연명하던 북한군들은 매일같이 굶다시피 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워낙 탈북자들마다 주장이 다르거니와, 적어도 군대만큼은 풍족하지는 못해도 배라도 채울 정도로 줬다는 탈북자 주장도 있으므로 부대마다 차이는 좀 있었던 듯하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모든 부대는 평등해 부식에도 차별이 없어야하지만, 북한은 부대마다 차등대우가 이뤄지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이 모두 맞을수있다. 예를들어 평방사나 류경수 땅크사단같이 북한군 내에서 중요한 메이커 부대엔 보급이 우선 제공되겠지만 동요계층이나 적대계층이 끌려가는 사실상 노예집단인 청년돌격대같은 경우엔 부식은 커녕 피복조차 제대로 제공되지않아 민가를 습격해 충당했던것처럼 말이다.] <인민이 사는 모습>에서 언급된 증언 중에 갓 수확한 [[쌀]]이 여러 '비리'단계를 거쳐 인민군 장병의 식탁에 오르는 과정과, 취사장을 직접 감독했던 (참군인) 간부의 부대는 식량 사정이 그나마 나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 책이 출간된 시기가 [[1990년대]] 초~중반이었으니 고난의 행군 이전 시기에는 확실히 관리만 잘해도 식량 공급에 큰 차질은 없었다고 보면 된다. 군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중후반부터 북한 사회의 식량사정은 지역마다 편차가 매우 심했다. [[황해남도]] 같은 경우는 심지어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어느 정도 버텼지만, [[함경북도]]나 [[자강도]], [[양강도]] 같은 북부 내륙권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식량 부족이 만연화되고 있었다. 결국 [[김정은]] 시대에 들어오면서 일정 규모의 부대마다 군부대에 농토를 떼어주고 [[농사]]만 전문적으로 짓는 소대를 신설해서 정규편제에 넣어버렸을 정도다. 이로써 인민군은 21세기에 [[둔전]]소대(?)가 정규편제에 포함되는 참 희귀한 군대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군인들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이제는 반대로 주민들이 군대의 농작물을 털어가기 시작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실탄을 들고 경작지 초병 근무를 서며, 김정은의 지시로 누구든지 군부대 경작지를 털러 들어오면 실탄을 갈기는 게 정식 대응 절차라고 한다.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에서 귀순한 병사 오청성의 사례를 보면, 그의 뱃속에는 소화가 덜 된 [[옥수수]]가 대부분이었고 내장도 한국인보다 짧았다고 한다. [[공동경비구역|JSA]]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시설에서 근무하고 있었기에, 계급을 막론하고 그래도 엘리트 계층 혹은 그에 가까운 계층에서 태어나서 자라났을 가능성이 높은 병사조차도 옥수수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는 것, 군부대 내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한 지 알 수 있다.[* 당장 국군 [[전진부대]] JSA대대 소속 근무헌병들은 국군에서 가장 많은 사격훈련을 소화하는 부대 중 하나이며, 특히 권총사격은 특전사보다 많이 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부대 평균 신장이 170대 중후반으로 1군단 산하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최정예 병력들을 골라서 입영시키며, 근무정복 및 부대 규정 또한 매우 빡빡하다. 즉, 이를 상대하는 북한 측 판문점 민경대대 또한 그에 못지 않은 특별 선발이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데, 그런 부대에서 근무하던 사람의 몸에 온갖 기생충과 소화도 잘 안 된 옥수수 낱알만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강원도(북한)]]와 [[황해도]] 지역 2군단에 배치되는 것은 아예 "허약([[영양실조]])에 걸리러 간다."라고 말하는 실정이다. 물론 부모들이 군대에 있는 자녀에게 돈과 음식 등을 보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일부 병사에 불과할 뿐, 일반 서민의 자녀는 꿈도 꾸지 못한다. 게다가 북한은 아직도 농사에 사용할 비료가 부족하여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데, 이렇게 기른 채소를 제대로 씻지 않고 먹어서 [[기생충]]에 감염되기도 한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radio-world/radioworld-11172017142126.html|최전방 북한군 영양실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19223.html|2017 귀순 북한군 기생충]] [[김정은]] 집권 후부터는 곰팡이가 뜬 [[옥수수]]라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식사량을 올리기 위해 제대로 씻지도 않은 옥수수를 가마에 넣어 끓여 먹이고 있다. 위의 채소도 그렇고 옥수수를 씻지도 않고 먹는다는 걸 계속 서술하는 이유는 씻을 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 공급 부족으로 인해 위생 상태 또한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령 소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그릇에 밥을 담아 먹은 군인들이 [[결핵]]과 [[폐렴]] 등 각종 [[전염병]][*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군대는 사회보다 훨씬 폐쇄적이고 격리된 공간이다. 그래서 군대에서 [[전염병]]이 커지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규모가 된다. ([[군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참조) 국군이 왜 그렇게 [[예방접종]]과 전염병 방지에 민감한지에 대해 생각해보자.]에 시달리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군은 그동안 [[비누]]와 [[치약]], [[칫솔]]만은 정상 공급되었는데[* 이것들은 [[중국]]에서 들여오면 군대로 공급하기 용이해서이다. 식량은 가다가 오래 걸리면 상하지만 비누는 아니니까.] 최근에는 이마저도 모자라서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소금으로 치아를 닦을 수밖에 없고, 비누도 없어 맹물 빨래를 하는 상황이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num=111632&cataId=nk04500|곰팡이 핀 옥수수밥 먹고 설사로 허약한 군인 늘어]] 상황이 이렇게 열악하기에, 새터민들은 복무 기간 동안 먹은 식단을 재연해도 다 먹지 못한다. 탈북장교 [[이철호(탈북자)|이철호]]가 한국의 재료들로 북한군의 명절 특식을 재연한 적이 있다.[* 현재는 [[유튜브]]나 네이버에 그나 다른 사람들이 업로드한 영상이 모두 삭제되었다. 그가 한국 생활에 부적응하여 아내에 대한 폭행과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제 만나러 갑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CnfhP2j6hM0|#(VPN 필요)]]와 [[북시탈tv]][[https://youtu.be/xfDoOv-QcAg|#]]에서도 북한군 음식을 재현하여 [[교차검증]]이 되는데 이철호의 재현과 일치한다. 그런데 작정하고 하루 종일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시탈의 두 사람은 결국 몇 숟갈 못 버티고, 결국 여기저기서 털어왔다는 명분으로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둔 [[마늘]]에 [[쌈장]]에 [[소금]]에 대놓고 페트병 물까지[* 심지어 다른 건 다 주머니에서 꺼내기라도 하지 물은 대놓고 카메라 밖에서 그냥 덥석 들고 온다.] 갖춰서 메뉴만 빼면 누가 봐도 남한 식사인 밥상 탈북을 감행했다.[* 영상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군은 이 문서에서도 선술했듯 실제로 민가로 가서 몇몇 식재료를 훔쳐와서 반찬으로 먹는다고 하니, 현대 북한군의 약탈경제까지 저런 방법으로 재현한 셈이다. 북한군에서 식사 시간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항상 났는데, 보면 다 마늘이나 파 같은 훔쳐온 것들을 꺼내는 소리였다나.][* 당연하지만 같은 재료로 만들었다고 [[북한]]에서 먹는 그대로가 아니다. 이철호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누누이 언급했듯 한국에서 유통되는 [[옥수수]]는 북한 것에 비해 질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먹는 찰기 없고 껍질 있는 옥수수는 도무지 시장에서 구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사료용 옥수수가 가장 근접하지만, 그마저도 북한 옥수수보다 질이 너무 좋아서 북한군이 먹는 옥수수밥을 완벽히 재현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북한군 식으로 쇠숟가락 2개로 밥을 살짝살짝 퍼서 찰기 없는 밥이 많아 보이도록 눈속임하는 방식은 재현이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 [[DMZ]]을 넘어 연천군 방향으로 탈북하여 귀순한 민경부대 출신의 노철민 씨는 군생활을 하면서 가혹행위를 심하게 당한데다 고질적인 식량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영양실조 때문에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탈북을 했다고 한다. 탈북 이후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체중이 겨우 39㎏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따뜻한 독방에서 쌀밥에다 여러가지 반찬들이 풍족하게 나오는 식사를 제공했는데, 북한군에 있었던 시절에는 매일 부실한 옥수수죽 같은 것만 먹으면서 쫄쫄 굶기만 하다가 따뜻한 쌀밥을 허겁지겁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반찬을 먹을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익숙하지가 않아서 미처 옆에 반찬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혹시나 식사에 독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주저했었지만, 배가 고파서 그런지 독살당할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배를 다 채우고 난 뒤에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https://www.insight.co.kr/news/346713|#]][[https://youtu.be/uOh50p63syQ|#]] 노철민 씨는 [[귀순]]한 이후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굶지 않고 음식도 제대로 잘 섭취하고 영양 상태가 좋아지자 체중도 늘었다. 그 당시 19세라서 성장기의 끝물이라지만 영양섭취가 잘 되다보니 키도 자랐는데, 정착 지원 기관인 [[하나원]]만 퇴소했는데도 8㎝가 자라서 키가 178㎝가 되었다. 심지어, 과식으로 인해 89㎏까지 늘어서 턱걸이같은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다이어트도 했고 지금은 몸도 근육질이 [[https://youtu.be/WUqI6EsaRzE|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